2011/monologue

익숙한 것에 대한 낯설음

spring_river 2011. 1. 10. 15:51


닷새 전,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왔었다...
결혼 패물을 몽땅 털렸다
...
잊어버리려고, 그리고 애써 좋게 생각하려 하고 있다
.
사람이 없을 때에 들어와서 사람이 안 다쳤으니 다행이다, 그렇게
...
올해 그냥 액땜한 셈 치자, 그렇게
...

그런데

혼자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

패물함이 나뒹굴고 있고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불켜진 안방을 목격한
그 짧은 몇 초간의 경악스러움
,
혹시 아직도 도둑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뛰쳐나와

시댁에 연락하고 기다리며 놀라움을 진정시킬 수 없었던 약 5분간의 두려움
이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잃어버린 물건들은 잊어버릴 수 있는데

이미 강하게 각인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직도 혼자 현관문을 열 때엔 나도 모르게 잠깐 멈칫해지는 걸로 보아선
......

그리고
...
도둑맞은 그 다음날 밤
,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왠지 편치 않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뭐랄까
...
바람피웠다가 다시 돌아온 배우자랑 함께 사는 기분이 아마 이런 걸까
......
반드시 Private해야 하는 당위성이 침해당한 느낌
...
내 가족만의 공간이 외부 침입에 의해 그 순수성이 짓밟혀진 느낌
...
그렇게 우리 집이 불과 이틀 전까지의 그 우리 집이 아니었다

집안을 감싸고 있는 공기 자체도 다르게 느껴졌다
.
내가 우리 집이 이상해..하며 얘기했더니

그루 아빠
, '운하임리히카이트(Unheimlichkeit)'란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이 살아왔던 세계가 한번에 무너져 버릴 때에 느끼는

섬뜩함... 친숙한 낯설음...

다행히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그 느낌은 옅어지는 듯도 하지만

100%
예전의 그 느낌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엊그제 밤
...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좀전에 케이블TV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백화점에서 반지들을 보는 장면이

그냥 괜히 떠올랐다.
반지 잘 끼지도 않지만 반지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진 거
...
패물도 패물이지만 특히 결혼반지가 없어진 데에 대해 아쉬워하던 그루 아빠
...
뭐 그런 생각들이 잇달아 떠오르던 중

갑자기 퍼뜩 그 생각이 났다
.
'
아참, 결혼반지 케이스는 내가 패물함 안에 안 뒀지 않나
?'
화장대 첫 서랍을 열어 뒤져봤더니 결혼반지 케이스가 정말 거기에 있었고

열어보니 결혼반지 두 쌍이랑 내가 가끔 끼던 골드 쌍가락지가 그대로 있었다.
화장품 샘플들이랑 잡동사니에 뒤덮여 있어서 도둑이 그건 놓친 모양이었다
.
되찾은(?) 결혼반지를 보며 둘이 얼마나 환호했는지
...
그리고 왠지 도둑한테 이긴 기분까지 들었다
.

그래..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리라
...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기억들에서도 서서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2011 >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랜만에...  (0) 2011.07.14
뭐가 중요한 거지?...  (0) 2011.06.08
어린이 공연을 생각하다...  (0) 2011.06.02
미래를 지나치게 궁금해하지 않기...  (0) 2011.01.21
e-book by iPhone  (0) 201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