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가 되면 그루와의 외출 장소를 고민하게 된다.
월요일부터 대부분 토요일까지도 엄마아빠랑 제대로 같이 못 놀다가
일주일 중 유일하게 하루내내 함께 할 수 있는 날이라
특히 오후시간을 함께 보낼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하루내내 집에서 책보고 장난감 가지고 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어도 오후 나절엔 외출을 해야 하는데
집앞 큰 공원은 주중에도 그루가 맨날 놀러가는 곳이라
이외의 나름대로 특별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게다가 우리가 자가용이 없는 관계로
놀러갈 수 있는 장소에 상당한 제한이 있다.
그래서 보통 만만하게 가는 곳이
집에서 버스 몇 정거장 거리의 백화점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가을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매우 좋은 날씨였고
왠지 그런 날 백화점이라는 실내 공간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그루야, 어디 가고 싶니?" 했더니
"그루랑 엄마랑 아빠랑 바다 가서 배 타자!" 한다.
얘가 우리 집이 무슨 바닷가 마을인 줄 아나~
암튼 인천까지 가기는 좀 망설여져서
여의도에 가서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그루를 핑계로 사실 그루아빠나 나도
한강유람선을 첨 타게 되었다.
소감은...
답답하고... 화가 나고...
정말 다시한번 우리나라의 저급함에 참기 힘들었다.
말이 유람선이지
난 한강변의 아파트들만 실컷 보다가 왔다.
물론 가끔 올림픽도로 등 한강변 도로들을 많이 달려왔지만
그다지 별로 바깥 풍경에 신경을 안 써서 잘 몰랐었다.
하긴 도로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풍경과
한강에서 양쪽 도로를 바라보는 풍경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후자의 경우... 단순한 주변 도로가 아닌,
서울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서울이란 도시가 얼마나 매력없고 형편없는 도시인가를...
정말 말 그대로 아파트가 병풍을 이루고 있다.
아파트에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산들은
아파트 위쪽으로 그 꼭대기 정도만 간신히 보일 정도다.
한강이 지저분한 건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도 없고...
유람선이라는 걸 탔으나
도대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
배 아래의 물을 봐도 한숨만,
풍경을 보노라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한강유람선이 아니라
서울 아파트 시찰선이라 함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나의 유일한 해외출장지였던
호주의 시드니 크루즈가 생각난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1시간 정도의 선상 크루즈는
정말 호주의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말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자연, 예술적인 건축물들,
도심의 첨단 빌딩들, 서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주택들......
첨단과 자연 그리고 삶을 농축해서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나름대로 기획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서울은 그만큼의 기획력도 없는...
천박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서울은 한강이 아닌 청계천 주변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한강이 수량변화가 너무 많아 개발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60년대말 서울 시장이
한강개발 3개년계획을 착수하면서 한강은 변모하기 시작했다.
한강변을 메우고 도로를 만들면서 금싸라기 택지를 조성한 것이다.
문제는, 하천을 개수하면서
부수적으로 생기는 택지를 활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땅장사를 위해 강을 매립하게 된 것이었다.
건설업 비수기의 남는 장비와 인력을 이용해
제방을 쌓고 모래를 부어 택지를 만들고
앞다투어 아파트들을 지어 팔고...
그렇게 정치행정권과 건설재벌의 신나는 유착이
지금의 한강을 만들었다.
그렇게 상처입은 한강을
1971년에 태어난 나와,
2001년에 태어난 그루와,
그리고 한국을 찾은 외국관광객이 함께 보고 있다...
200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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