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연극 '프루프'를 봤다.
기자들이 모두 앵무새는 아닐진대
대부분 입을 모아
'대본-연출-연기' 3박자가 훌륭히 조화된 작품이라는
호평기사들 뿐이었다.
그래서 특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연극을 본 결과는...
호평의 헤드라인이 별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근래 본 연극 중 보기드물게 탄탄한 대본이었고,
추상미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훌륭했고,
(특히 추상미는 너무나 적역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많은 여배우들이 탐할 만한 캐릭터였다.)
약간의 미스터리 형식을 완급을 조절해 가며 표현한,
그리고 한 장소에서 극을 펼쳐나간 연출도 깔끔했다.
각각의 막 구성을 반전의 내용으로 서프라이징 엔딩 처리한 점,
과거와 현실을 교묘하게 잘 교차시킨 점 등도 인상깊었다.
극의 내용은 말 그대로 '증명'이다.
발견된 수학노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증명의 Motive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캐서린의 25년간의 삶, 캐서린 자체가 증명된다.
그녀의 물려받은 천재성과 광기, 가족에 대한 애증, 사랑 등...
연극을 보러가기 전,
오랜만에 현정이와 진선이에게 보낸 메일 중에 그루의 안부를 적은 내용 중 이런 말이 있었다.
...... 그루는 잘 크고 있다.
다행히 나를 닮아 똑똑한 것 같고
안타깝게도 남편을 닮아 무지 말 안 듣고 장난이 심하다.
(물론 남편은 나와 반대의 생각이다) ......
연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닮기 그리고 벗어나기'
... 서로 그것들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있는 것 같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것은 닮았으면 하는 것
또 이건 닮지 말았으면 하는 게 있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종 망각하고 소유물로 집착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자식이 자기 인생의 한 목표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겠다고 자식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한다.
(물론... 부모 자식은 정상적인 경우 벗어나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에게,
닮고 싶지만 닮지 않아 실망스러운 것도 있고
제일 무서운 건
난 절대로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걸
어른이 되어 정말 똑같이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또 절대 그 말은 틀렸다고 생각했던 게
어른이 되어 그 말이 사실임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때이다...
부모의 그늘에 있을 때엔 그로부터 벗어나는 게 꿈이지만,
얼마 후 자기의 자식에게 또 하나의 그늘을 치고 있게 된다.
캐서린과 그녀의 아빠 역시
서로 함께 살아간 삶 속에서
닮음이라는 것에 대해 공존하는 소망과 거부,
또 역시 벗어남에 대해 공존하는 소망과 거부가
여러겹 교차되고 얽혀 있다.
내가 딸로서 경험했던 바는 생략하려 한다.
그건 정말 너무나도 많은 얘기를 해야 하므로...
33년간의 얘기보다는 2년간의 얘기가 더 빠를 테지...
내가 엄마로서 그루에게
아직까지는 많은 걸 바라지는 않고 있다.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음...특별히 나를 닮았으면 하는 건 별로 없다.
다행히 엄마아빠를 닮아 기본적으로는 똑똑한 것 같으니
그걸 밑천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길 바랄 뿐이다.
그루가 하루하루 커 가는 것을 보면서
문득문득 발견할 때가 있다.
어, 저건 지 아빠를 닮았네...
어, 저건 날 닮았네...
(날 닮아서 걱정스러운 것 한 가지가 벌써 생겼다.
모기 물리면 크게 부풀고 금방 아물지 않는 것...)
그런데,
그런 걸 발견할 때마다 신기하고 흐뭇하면서도
그냥 괜히 섬뜻해질 때도 있다.
유전자의 힘이라는 것...
과연 그루가 어떤 걸 타고났을까 하는 생각에...
물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중요하긴 하다.
똑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면
부모가 어떻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느냐가 커다란 영향을 줄 테니...
닮는다는 건
그게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정신 번뜩나게 하는 일이다...
200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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