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내면의 분노와 절망을 무참히 드러낸, 날 것의 걸작.
고대 그리스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새롭게 그려낸 <메디아>는
2014년 초연 직후 세계 무대에서 가장 뜨거운 연극으로 손꼽히는 사이먼 스톤의 대표작이다.
정교한 각색, 인정사정없는 연출력, 날 것 그대로의 연기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은
평단으로부터 "현대 연극의 중대한 이정표"라는 찬사를 받았다.
사이먼 스톤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오늘날에는 어떤 모습일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현시대로 신화 속 메디아를 소환한다. 1955년 미국, 불을 질러 아이들을 살해한
여의사 데보라 그린의 실화를 엮어 단순히 질투에 눈 먼 여성의 비극이 아닌,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잃은 아나의 처절한 목소리가 마음 속 깊은 곳을 뒤흔든다.
★★★☆
# '메데이아'는 자세히 알고 보면 사실 좀 끔찍한 비극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Simon Stone 연출 버전의 이 '메디아'의 가장 훌륭한 점은
관객들로 하여금 매우 자연스럽게 이 여인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인물을 이해하게 만든 건
탁월한 연출과 흡인력 높은 연기 때문이었다.
이 공연은 전체적으로 미니멀하면서도
매우 자극적인 요소가 가득한 원작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그 상징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세련된 연출 해법이 가득했다.
특히 후반부에 잿가루를 활용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 이 작품에서 차용한 실화 덕분에
에우리피데스의 고대 그리스 비극이
현대적인 비극 드라마로 잘 변신하였고,
원작의 주제가 의외로
시대를 초월해 충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또한 놀라웠다.
시작부터 서서히 차곡차곡 쌓아올려지다가 엔딩에서 그 힘으로 폭발하는
Marieke Heebink의 연기는 무척 뛰어났다.
단순히 질투에 눈 먼 여인이 아닌,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
자신이 만들어 준 것의 배신에 대한 분노로
자신이 만들어 준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처절함...
그리고 자신을 향한 모욕과 경멸의 시선에 대한 대가....
시대를 관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비극 <오셀로>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속,
의심과 질투로 부서져 내리는 나약한 인간의 초상을 그린 셰익스피어 불후의 명작이다.
연출가 클린트 다이어는 기존의 '오셀로'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해,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타고, 현재를 관통하는 작품은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 등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찬 사회를 낱낱이 드러낸다.
사회운동가적 면모를 가진 데스데모나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음으로 저항하는 에밀리아는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 자일스 테레라와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가 진한 몰입감을 자아내는 가운데,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
# 인터미션의 크리에이터 막간 토론을 통해
유럽에서의 이 작품에 대한 위치를 엿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흑백 갈등을 직접적으로 겪는 나라가 아니다보니
그냥 순수하게 고전 작품으로만 받아들여지는 반면,
영국에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십년 전 공연 때까지만 해도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키스씬에 항의하고 퇴장하는 관객들도 있었다고 하니...
생각해 보면 드물게 흑인이 주인공인 작품인데
또 따지고 보면 그 주인공의 변화가 바람직한 캐릭터로 나오는 게 아닌지라
이 작품은 흑인에게도 백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비해
재미없는 작품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듯했다.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최고의 칭찬은
'재미있게 본 오셀로'인 듯한데
그렇다면 성공했다.
난 매우 재미있었다!
# 작품의 여러 포인트들을 잘 살린
영리하고 세련된 연출이 돋보였다.
무대와 조명, 음향 모두 매우 훌륭했다.
앙상블을 그리스비극 코러스처럼 활용한 점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셀로를 비롯해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했다.
흠뻑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보았다!
# '햄릿', '리어왕', '헨리5세', '줄리어스 시저',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등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NT Live로 꽤 여러 편 봐 왔는데
실제 연극이 아닌 NT Live로 보는 이 방식이
객석에서 무대 위 배우의 음성을 귀로 듣기만 하는 것보다
자막을 보면서 대사를 듣다 보니
셰익스피어의 엄청난 필력과 말맛이 제대로 느껴져서 좋다~
파멸했으나 찬란한 갈매기가 훨훨 난다.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 체호프의 '갈매기'를 극작가 애니아 라이스가 21 세기를 배경으로 각색,
'시라노 드베르주라크'의 제이미 로이드가 연출했다.
사랑과 고독에 대한 희곡이자 작가의 자전적인 고뇌가 담긴 고전으로 젊은 예술가의 열정과 엇갈린 사랑,
현실과 꿈의 간극을 그린 작품은 출구 없는 절망과 우울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소품도, 무대 장치도 없는 간결한 무대는 나란히 앉은 인물들의 대사와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다.
제이미 로이드의 독창적인 연출과 애니아 라이스의 재치있는 각색이 더해진 <갈매기>는
19세기 후반 극작가의 은유를 넘어 우리 시대 모든 세대의 분열과 슬픔, 분노, 희망을 상징하기에 이른다.
'왕좌의 게임'으로 알려진 에밀리아 클라크가 니나가 되어 섬세하고 깊은 내공의 연기로 눈길을 끈다.
★★★☆
# 제이미 로이드 연출의 전작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도 그러했지만
이 공연은 미니멀을 아예 넘어섰다.
무대를 정말 완전히 비웠다. 아무 것도 없다.
동선, 특히 배우의 동선도 거의 없다.
전체 배우들이 무대 등퇴장 없이
의자의 배열과 재배치로 최소한의 움직임 속에
각자의 의자에 앉아 대사를 읊는다.
그리고 그 대사 역시 대부분 시종일관 평평하고 낮은 목소리다.
1막을 볼 때엔 인물 관계만 집중하게 하는 유니크한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2막까지 동일하게 이어지니 단조롭고 지루해졌고
각 캐릭터들이 그닥 잘 살지 않는 단점들도 느껴졌다.
사실 이 작품은 모든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스토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인물들인데...
올해 초 우리나라 연극으로 본 '갈매기'가 특히 연출적으로 실망스러웠던지라
제이미 로이드 연출을 많이 기대했었는데...
전작 '시라노'는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 미니멀 무대의 연출도 효과적이었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과연 최선이었나 약간 물음표가 떠오르기도 하는...
# 극 서두의 화제로 등장하는,
콘스탄틴이 만든 연극이 혹시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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