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던 바로 그 날
프로이트의 초대로 그의 런던 집에 방문한 C.S. 루이스_
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두 사람의 논쟁이 펼쳐진다.
대표적인 무신론자로 꼽히는 프로이트와
무신론자에서 회심하여 기독교 변증가로서 프로이트를 비판한 루이스의
가상의 만남을 전제로 하여 작품화한 연극이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받았던 평단의 리뷰
'올림픽 펜싱 경기를 보는 듯한 멋진 작품' 문구가
이 공연의 대표적인 카피로 올라와 있는데
공연을 보니 그 글귀가 확 와 닿았다.
# 두 사람의 설전을 보고 있노라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의 수(手)를 읽으며
빈틈을 노려 우아하게 그러나 스피디하게
찌르기를 하는 펜싱 경기와 정말 유사하다.
펜싱은 복싱과 체스가 합쳐진 운동이라고 누군가 말하던데,
펜싱은 자신이 가진 수가 다양해야 하고
자신의 수가 상대에게 읽히면 패하게 된다.
상대의 수를 읽고 끊임없이 공격과 수비를 해야 한다.
(사실 펜싱처럼만 논쟁과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체급도 없어서 누구나 동등하고
무조건 찌른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유효한 찌르기가 있고
경기 중 등 돌리기는 금지되어 있고
경기 후에 격식있는 인사까지... 얼마나 신사적인가!)
이 작품은 그야말로
올림픽 결승전같은 팽팽한 실력과 긴장감이 느껴질 만큼
꽉 차게 훌륭한 한 판이었다.
# 배경적인 상황도 큰 몫을 했다.
전쟁을 앞둔 공포, (프로이트는 구강암 병마에 시달리는) 죽음을 앞둔 고통은
신의 존재에 관한 설전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게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방이 무색하리만큼 두 사람을 하나되게도 만들었다.
# 연극 무대로는 처음 뵙게 되는 신구 선생님의 연기를
(대사량이 많아 약간 불안한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되어 매우 좋았고,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이석준 배우 또한
많이 무르익어 있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수를 보내고 싶었던 건,
보통 어려운 내용의 대사를 하는 역할의 경우엔
인물의 연기와 대사가 겉도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이 두 배우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만큼 내면화하기 위한
치열한 공부와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두 배우 모두 그대로 프로이트와 루이스였다.
지적으로도 연극적으로도 우수했던 공연이었다.
# 어렸을 때부터 성당을 다니다가
정확히는 성당 부설 유치원을 다니면서부터 다니기 시작하여
부모님이 신자가 아니어서 영세와 견진은 중학교 때에 받았고
초/중/고 내내 미사 반주를 할 만큼 열심이었는데
대학교 1학년 중반부터 냉담기가 시작되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그러던 중 재작년 가을부터 (세어 보니 28년만에)
다시 미사를 보기 시작했다.
서너번 나가보다가 이젠 다니기로 결심하고
고백성사를 보는데 막 눈물이 났었다...
암튼,
신을 다시 믿기 시작했지만
크리스트교의 중요 전제이기도 한 '하늘나라'는
도무지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죽은 뒤의 세계에 관한 믿음이 워낙 없어서...
# 무신론 vs 유신론의 연극을 보고난 바로 다음날
시의적절하게도 미사 복음말씀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였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악인들이 드러날 때에 사람들은
대체 신이 있긴 하는 거냐면서 원망한다.
가라지를 바로 뽑지 않고 수확 때까지 두는 것은
악을 곧장 벌로 응징하지 않고
잘못을 회개할 기회를 주어 심판을 미루고 기다리는
하느님의 인내요 사랑이라고 한다.
(대신, 뉘우치지 않으면 수확 때에 태워버리는...)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시간을 살아간다.
천당에 가고 싶고 지옥이 무서워서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단 한 번 사는 거라 해도
응당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맞는 것 같아서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해 왔던 건데,
용서를 빌지 않는 뻔뻔스러운 어떤 악인을 떠올리니
하늘나라의 기능이 꽤 괜찮아 보인다.
죽어서 분명 벌 받을 거야 라고 믿지 않으면
정말 화날 것 같다.
이젠 '하늘나라'도 믿으려고 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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