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정영선
어린이날 연휴 월요일에
1세대 조경가이자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로 알려진 정영선 기획전에 다녀왔다.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그녀의 작업 궤적(우리나라의 역사이기도 한...)이
사진과 설계도, Mock-up 들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분이 조경에 참여한 명소들이 무척 많아서 놀랐는데,
선유도공원처럼 너무 좋아했던 곳들이 바로 이분의 손길이 닿은 거였구나
알게 되어 한결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예술의전당처럼 그동안 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드나들면서도
원래 그러했던 곳에 건물에 들어선 것마냥 너무 자연스러워
특별히 조경을 한 것으로 느끼지 못했던 곳들도 있었다.
그분의 작업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하나의 공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건축과 조경이 얼마만큼 유기적 협업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의 방향과 그레이드와 가치가 달라진다는 걸 새삼 느꼈고
대표작들 하나하나가 건축과 조경의 내밀한 상생 작용이 돋보여
더욱 훌륭하게 다가왔다.
정영선은 우리나라의 조경 미학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편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이 나와요.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마침 일본의 정원들을 보고난 지 얼마 안 되어 이 전시를 접해서인지
많이 와 닿는 얘기였다.
일부러 만든 것 같지 않은 경치...
우리나라의 전통 명소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된 포인트 맞다.
오래 전 광고회사에서 근무할 때
이런 말이 있었다.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든다.'
아무리 탁월한 시안을 제시해도
광고주가 채택하지 않으면 버려질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을 알아볼 줄 아는 눈과 머리가 중요한 이유다.
건축(+조경)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그 철학과 아이디어를 살 수 있는 의사결정자가 있어야
비로소 현실화되는 거니까...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아산병원 녹지정원, 아모레퍼시픽 사옥 등을 비롯해
여러 곳의 경우에서 느꼈는데,
자본주의적 사고에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을
강력하게 설득하며 추진했을 그녀의 뚝심과
이를 받아들인 각 공간의 공공기관장이나 사기업 오너들의
당시 다소 과감한 선택이 있었기에
이렇게 멋진 친환경 공간들이 탄생되었을 테니
여러 모로 대단하다 싶은...
전시를 보고나니, 가 보고 싶은 곳이 더 많아졌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숲길도 거닐어 보고 싶고
'희원'이 있는 용인 호암미술관, 대구 사유원도 방문해 보고 싶어졌다.
전시 캡션 중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옮겨 본다.
<조경과 건축의 대화>
우리가 다루는 대지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절대 독립되지 않고 시·공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조경이라는 작업은 무엇을 만들고 생성하는 창작 이전에
'관계를 다듬고 설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조경설계라는 한정된 분야에 있으면서
건축, 토목설계가 포함된 다양한 규모의 마스터플랜을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관계를 살피고 조정하는 일에
남다른 가치를 두는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영선, 「건축과 자연의 경계에서 관계 맺기』
<정원의 재발견>
선조로부터 향유되어 온 우리 고유의 식재와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소개한다.
정영선의 정원은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는 바라봄의 경험,
경치를 조망해 가는 수행적 요소에 가치를 둔다.
이는 자연의 아름다운 국면을 읽어내고 나와 관계 맺게 하는 차경(借景)의 원리,
곧 경치를 빌려오는 전통 정원의 중요한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나무나 꽃을 식재함에서 그는 관상적 가치를 넘어
생태적인 특성과 형태, 나아가 식물에 내재한 의미를 고려한다.
동시에 우리 들과 산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수목을 주로 심으며
마치 저절로 자라 이루어진 듯한 정원을 추구해 왔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
1980년대부터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방식의 변화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수요가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동시에 자연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생기면서
도시 외곽과 경관의 이점이 있는 지역에
예술, 교육, 체육, 관광을 아우르는 문화기관과 레저시설이 계획됐다.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였던 정영선은 일찍이 이러한 공간의 조경을 맡았다.
그는 각 프로젝트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지형과 땅의 맥락을 읽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함과 동시에
자연의 자생적 힘을 북돋기 위한 생태적 복원을 시도한 것이다.
<한국의 도시경관>
도시조경은 단순한 장식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도시생활을 담는 그릇인 공간으로서의 조경,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예술로서의 조경,
도시의 생태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캠페인이나 행정으로서의 조경이
하나로 녹아든 것이 도시조경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중앙정원인 선큰가든에
정영선 조경가가 상설작^^을 선사하였다.
미술관 내부 네 면에서 각각 다른 뷰가 펼쳐지는,
사시사철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줄 이곳을
앞으로 지켜볼 생각에 또 마구 기대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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