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brief comment

En Attendant Godot [고도를 기다리며]

spring_river 2019. 5. 16. 15:56

 

 




★★★

 

 

아마도 1997년

 

물론 기본적으로 기억력 감퇴의 문제이기도 하고
핑계를 대자면 공연을 약간 많이 보는 편이기도 하여
(하필 대다수 케이스이긴 하지만) 한 번만 본 작품들은
한참 후에 떠올려보면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런데
매우 오래 전에 본 작품이기도 하고
한 번밖에 보지 않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그 관극의 경험이 또렷하고
그에 파생된 부수적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던 공연 중 하나가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1997년 산울림소극장에서 그 작품을 만났다.
한명구 안석환 김명국 캐스팅이었다.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관극의 충격과 오랜 울림이 아주 큰 공연이었다.



# 안석환 배우

 

그 공연부터였다, 안석환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몇 년 후에 본 ‘남자충동’도 어마어마했다.
물론 TV와 영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만, 역시 그는 무대에서 최고다.



#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황량한 무대 위에 물음표 모양의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심플하기 그지없으면서도 함축적인 이 무대디자인에 홀딱 맘을 뺏겼다.
그 다음부터 작품 속 이 분의 무대디자인은 내게 무조건 신뢰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우리 회사와 몇 작품을 예전에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웃으면서 친절하게 인사나누는 다른 감독님들에게와는 달리,
이 분께는 인사드리면서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이 분을 직접 뵙다니 너무 놀랍고 좋아서^^)



# 동음 반복 애칭

 

이 극에서 블라디미르는 ‘디디’, 에스트라공은 ‘고고’라는
애칭으로 서로 불리운다.
내가 이 공연을 보았던 당시, 인터넷 보급으로
이러저러한 온라인사이트들이 이제 막 생겨나고 있을 때였는데
나도 그들의 애칭과 비슷한 방식으로 같은 음 두 글자를 따서
숫자와 조합해 패스워드를 만들었다.
그래서 패스워드 연상 키워드 중 하나로 고도라는 단어가 늘 포함되었다.
조합 숫자는 이후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 동음 두 글자를 영어로 바꾼 부분은 20년 가까이 사용했었다.
(몇 년 전 아이패드 해킹을 된통 당한 이후에
모든 패스워드를 다 전격 교체하면서 그 이후부터에서야 쓰지 않았으니까…)


# 50th Godot

 

한 작품의 공연이 50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 작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임영웅 연출가의
어쩌면 마지막 연출이 될 이번 50주년 특별공연을 위해
초반부터 함께 참여했던 관록의 배우들이 모였다.

 

(한명구 배우는 이번 공연에 참여하지 않아서)
정동환-안석환-김명국 조합을 보기 위해
뒤늦은 예매에 사이드 구석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50주년 공연 뉴스를 진작에 접하고도
왜 티켓오픈 시기를 바보같이 못 챙겼을까ㅜㅜ)



긴 시차를 두고 동일한 작품을 대할 때
그 경험은 오래 전 그 때와 결코 같을 수 없다.
자신이 살아온 만큼의 세월의 더께로 인해
같은 단어라도 그 무게가 달라지고
같은 모습이라도 그 이해와 교감의 편차가 달라진다.

 

이 작품을 22년만에 다시 마주하였다.
그런데 동일한 작품이지만 동일한 공연은 아니다.
이 작품을 통해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의 '고도를 기다리며'》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던
초연 당시 30대의 연출가는
초기 알츠하이머를 겪고 있는 80대에 이르렀고,
20대부터 이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한 배우는
이제 70세, 그리고 60세가 되었고,
관객인 나 또한 그 사이 20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작품이 읽히는 사회도 변하였다.

모두가 결코 같은 공연이 아니었다.

 

무려 50년동안 우리는 고도를 기다려왔고

그만큼 시간의 깊이가 더해진 공연이었다.

20여년 전 작품에서는 

그 기다림이 뭔가 필사적이고 안타까웠다면

지금 이 노장배우들의 기다림은
놀이였고 인생이었고 존재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욱 쓸쓸했다.
엔딩 씬의 몇 초간은 절로 울컥했다.
울음을 꾹 참고 
최고의 에스트라공, 최고의 블라디미르,
그리고 최고의 포조에게 박수를 보냈다.

임영웅 연출의 어쩌면 마지막 혼이 담겨있는
(아마도 앞으로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정말 순수하게 그의 버전으로는 마지막이 될)
그런 뜻깊은 무대인 데다가
이 노장배우들 또한 이 작품으로는 
이제 다시 볼 기회가 쉽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진짜, 놓치지 않고 보길 잘 했다는 마음이 드는,
어쩌면 또 오래도록 잊지 못할 공연이었다...

 

 

p.s.
공연 보기 며칠 전에 우연히
한 매체의 임영웅 선생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재미있는 대목이 있었다.
언젠가 이 작품을 준비하던 중에 한 배우가
바람소리 음향효과를 넣으면 고독감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임영웅 연출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연기를 잘하면
관객은 저절로 바람소리를 듣는다고...

근데 어제 공연에서...
2막이 거의 끝나가는 즈음
해가 저물어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두 사람만이 황량히 남아 있을 때부터
정말 내게 바람소리가 들렸다...
이 두 배우는 그걸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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