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고 이 곳에 Brief Comment를 남겨 오면서
이번 공연만큼 뭔가를 쓰기 전에 이토록 심란한 건 또 드문 일이다...
사실 이 뮤지컬, 별로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팀에서 근무했던 옛 직원이 그 작품 마케팅 TFT에 프리랜서로 들어가서
시간 내서 꼭 보러 와달라고 초대권을 친히 보낸지라 그냥 그 정에 이끌려 보게 되었다.
뮤지컬 '피맛골 연가'는 시작점부터 뚜렷한 목적을 띤 공연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뮤지컬을 한 편 만들고자 하는
서울시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관제 뮤지컬이다.
작년부터 Pre-Production이 시작되었을 때의 프로젝트명 '뒷골목 중매쟁이'가
올해 본격적으로 공연을 알리면서부터 '피맛골 연가'로 바뀌었다.
피맛골이라...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600년 전통의 서민들의 거리답게 선술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던 그 피맛골을
불행히도 난 알지 못한다.
'백마'는 나의 대학 초년시절에 일산 재개발로 사라져 아쉽게도 가 보지 못했던 곳이고
(동물원의 '백마에서'라는 노래의 정서가 그래서 피부로 와 닿지는 못한...)
'피맛골'은 종로에서 잘 놀지 않은 탓 + 나의 무지함 탓에 이제는 놓쳐 버린 곳이 된...
그런데
서울시에서 만드는, 서울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의 제목이 '피맛골 연가'라...
이명박 서울시장 때부터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디자인 서울'이라는 ('디자인'이라는 멋진 단어가 이처럼 부끄러울 수 없는) 모토 하에
피맛골을 확 철거해 놓고는 '피맛골 연가'라...
이건 '아이러니'라는 말도 너무 고급스러운 말이다.
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말 그 어떤 단어보다 욕이 어울리는 상황이다.
일단... 이것저것 다 떠나서 공연 자체만 얘기하자면...
서울시의 든든한 지원 덕에 (이런... 어떻게 얘기해도 공연만 얘기할 수 없네...)
공연계 탑 클래스에 드는 크리에이티브팀들이 구성되었고
극본 배삼식, 음악 장소영, 무대 서숙진, 안무 이란영, 의상 한정임 등
이들의 오랜 사전 공동작업의 결과는 탄탄한 작품 완성도를 낳았다.
남녀 주인공 박은태, 조정은은 그들의 뛰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웬만한 대형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대규모 앙상블들의 힘도 상당히 컸다.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작품은 꽤 잘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석의 열렬한 환호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정말 이 작품이 그렇게 좋은 건가? 아님 가격 대비 만족도인가?...
가격 얘기가 나온 김에 다시 공연 외적인 요소로 돌아가보면
이 작품은 서울시에서 돈을 벌고자 한 목적인 아닌 도시 홍보 목적이었기에
티켓가격이 최고가 5만원(보통 동일 공연장 티켓가의 약 1/3 수준)으로
매우 저렴하게 책정되었고, 게다가 서울시 주관의 '천원의 행복' 이벤트도 이루어졌다.
10일간의 짧은 공연기간, 총 12회의 공연_
3천석 규모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매회 거의 꽉 찼다.
물론 티켓가격의 힘이 컸다.
수익구조를 당연히 계산하여 이 작품이 타 공연처럼 최고가 10~12만원이었다면
결코 이와 같은 흥행은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작비 22억이 들었다는 이 작품,
위 공연 환경에서 전회 매진되었다 해도 티켓수익은 약 10억원 수준이다.
나머지 12억은 좋게 말하면 서울시에서 우수 문화공연을 시민들에게 지원한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서울시의 세금이 사용되었다...
1막 공연이 끝나고 (다시 말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만족한다...)
인터미션 시간에 프로그램을 뒤적이다 맨 앞장에 있는 오세훈 시장의 인사말
'뉴욕의 <브로드웨이 42번가>나 런던의 <메리 포핀스>처럼
서울도 서울을 상징하는 뮤지컬이 있어 도시를 세계에 알렸으면 한다'는 문구를 보고
공연에 대한 감흥이 사라지며 진짜 확 빈정 상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정말 머리가 있긴 한 거야......
공연이나 영화, 문학 작품을 통해 어떠한 도시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지고
관광객들에게도 멋진 연상 포인트로 자리잡을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그것이 잘 보존되어 있을 때이다.
십분 양보해서 뮤지컬 '피맛골 연가'가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되었다 치자,
대체 이 작품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서울의 도시 이미지가 과연 있기는 한 거며
이 공연 관람이 계기가 되어 찾아가 볼 수 있는 피맛골의 흔적이 과연 있는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무자비하게 철거를 해 놓고는
조선시대 그 곳에서의 사랑과 서민 애환을 다룬 이야기를 대표 문화 상품으로 만든다?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배짱인지......
뮤지컬 '피맛골 연가'는
창작 뮤지컬 작품 자체로는 상당히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라는 목적성에는 하나도 맞지 않다.
아무런 이미지나 고유 컬러를 지니지 못한
서울이라는 도시의 천박하고 그래서 불행한 스토리를
굳이 알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인터넷에서 피맛골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피맛골의 마지막 식당이 철거하면서
그 주인장 내외가 써 붙였다는 만가와 그에 대한 기사...
'피맛골의 곡' 문구를 읽어보니
어제 들었던 그 어떤 뮤지컬 넘버의 가사보다 절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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