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가 학교에서 3학년 교과서를 받아왔다.
교과목이 거의 2배 가까이 늘었다.
3학년 때부터 그놈의 영어 교과서도 있고
도덕, 사회, 과학 교과 과목도 새로 생겼고
별도 과목 없이 뭉뚱그려 수업하던
음악, 미술, 체육도 이제 따로 교과서가 있다.
그냥 한두권 들쳐보다 보니
도덕 교과서 맨 앞장에
낯익으면서도 낯간지러운 상황이 새삼 눈에 띈다.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적혀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
그런데...왠지 그 문구가 낯설다.
이게 뭐지? 하며 다시 자세히 보니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건 또 뭐야...
바꿀려면 새끈하게 바꾸던지 아님 없애든지 몇몇 문구만 수정 및 삭제되어 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으로 바뀌었고
몸과 마음을 바쳐 라는 생각해보면 섬뜩한 그 문구는 빠져 있다.
몸과 마음을 바쳐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랜다...
이게 언제 바뀌었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 봤더니
그동안 꽤 논란이 되었던 토픽이었었네...
시작은 60년대에 충남 교육위원회에서였는데
70년대초 유신을 앞둔 박정희정권의 지시 하에 이를 전국 학교에 지침 하달하여
전국민이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는 경례를 하며 암송하는 복종의 맹세가 되었으며
2006년에 한겨레21에서 이것의 전체주의성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국회에서도 논란이 일다가
2007년 결국 약간의 문구 수정을 거쳐 그대로 현존하게 된 것이었다.
나 역시 학교 다닐 때엔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반사로 읊던 것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으면서도 섬뜩한 문구다.
십수년간 그 맹세를 합창하면서도
몸과 마음을 바쳐 국가와 민족에 충성을 다해야지 하며
단 한번도 마음깊이 다짐하진 않은 걸 보면
적어도 내겐 아무런 구속력 없는 虛言에 불과한 듯도 하나
그 엄숙한 코미디가 40년 가까이 국민들 전체에게 징그럽게 강요되었다는 건
맹목적 국가주의를 삶의 양식으로 뿌리깊게 자리하게 한 극악한 폐해다.
그것 뿐이랴? 꽤 긴 문장의 국민교육헌장도 달달 외웠어야 했지, (이것도 아직 있나?)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 나오고 대한뉴스 나왔지...
예전에 팀원들끼리 점심 수다 중에,
매일 5시에 온 국민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국가하강식 얘기가 나오니
우리 팀 20대 애들이 어리둥절해하며 그게 뭐예요?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니네는 모르는구나, 다행이다, 모르는 게 낫다......
아니, 자발적으로 충성을 하고 싶게금 그런 나라를 만들던지
자기는 대한민국이라는 회사의 전권을 틀어쥔 CEO,
국민은 월급받고 살고 싶으면 닥치고 말을 들어야 하는 부하직원인 줄 아는 인간이
갈수록 이 나라를 천박하기 그지없게 만들고 있다 이거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아니면 충성 안 해도 되는 거지?...
충성이나 자랑스러워함은 고사하고
적어도 사랑하게금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에잇, 말을 말아야지......
그루 도덕교과서 내용도 언제 다시 한번 봐야겠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그러한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지
여전히 국가주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그런 주장만을 부르짖고 있는지...
그루한테 도덕교과서 맨앞장을 보여주며 무슨 생각이 드냐고 만일 물어보면
아마 그루는 이렇게 되물을걸...
"엄마, 맹세가 뭐야?"
p.s.
그날 집에 가서 그루한테 도덕교과서 앞장을 펴고 한번 읽어보라고 시켜봤다.
신나게 읽는 그루...
"그루야, 이거 읽고나니까 무슨 생각 들어?"
무슨 말인가 싶어 그루는 그냥 말똥말똥 나를 쳐다 보고 있다.
"그루야, 맹세가 무슨 말인지는 알아?"
"응. 꼭 뭐 하겠다고 하는 거 아냐?"
"맞아~ 그럼 넌,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할 거야?"
"(거침없이) 응!"
"왜??"
"우리나라잖아!!"
"......"
나보다 낫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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