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연극계에서
소위 여배우 트로이카로
박정자, 손숙, 윤석화를 꼽는다.
그런데...
이들과 비슷한 연배와
경력을 지닌 그리고
못지 않은 훌륭한 실력을 지닌
김성녀는?
아마도 그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녀의 거의 모든 무대 생활을
차지해 온 마.당.놀.이.
우리나라의 마당놀이를 떠올릴 때
김성녀 없는 마당놀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이지만
바로 그 마당놀이라는 것 때문에
메이저 장르로 취급되지 않고
그리고 그녀의 존재 역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연상되지 않는 것이다.
이따금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를 찾았던 그녀가
작년 한 연극무대에 올랐고
이 작품으로 인해 '여배우 김성녀'가
뒤늦게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가슴 깊숙이......
작년 이 작품에 대한 큰 호평에 솔깃하여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보고 지나갔었다.
이번 앵콜공연은 꼭 놓치지 않고 보리라 마음먹고
1~2월 나의 공연 관람 리스트가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서 드디어 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겐 흔치않는 케이스인... 직접 예매해서...)
연극 '벽 속의 요정'은 한국전쟁을 통한 이념의 대립 속에서
한 가정이 겪는 비극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다섯 살 여자아이가 행상을 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어느날 아이는 벽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벽 속에 요정이 산다고 믿는다.
벽 속의 요정과 아이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아이는 요정에게서 옛날 이야기도 듣고 노래도 배운다.
그렇게 성장하여 어른이 된 아이는 벽 속의 요정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엄밀히 따지자면 사회주의자가 아닌 휴머니스트였지만
이념 대립 속에서 억울하게 반정부인사로 몰리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벽 속에 몰래 숨어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40년 동안!)
이 작품은 이념 대립이라는 역사적 상처, 아버지와 딸의 애틋한 사랑,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의 강인한 모습과 사랑을 가슴 뭉클하게
그리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려내고 있다.
모노 드라마이지만 춤과 노래, 인형극, 액자식 구성 등 단조롭지 않고 다채롭다.
'벽 속의 요정'이 김성녀씨를 위한 손진책씨의 결혼 30주년 선물이라는 에피소드처럼
이 작품을 과연 김성녀가 아닌 다른 누가 할 수 있을지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벽 속의 요정'은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이다.
김성녀의 카리스마는 매우 독특하다.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이면서도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아닌
관객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카리스마이다.
아마 수십년의 세월을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보낸 마당놀이 공연의 경력이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이러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만들어낸 것일 게다.
의상과 분장의 변화 없이 간단한 소품만으로 아니, 어떤 경우엔 그 상태 그대로
남녀노소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연기력 역시 오랜 마당놀이의 연륜이 바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녀 혼자, 40년의 세월을 지나는 딸,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주변인물들 등
서른 개가 넘는 배역을 너끈히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벌써 환갑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그녀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이얀 바닥 그리고 그 위의 침대 하나, 문갑 두 개, 의자 하나
이렇게 하얀 공백이 느껴지는 그러한 비어있는 무대를
그녀 혼자서 정말 꽈악 채운다.
그리고 외국 원작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을 만큼의 뛰어난 번안,
그리고 연출, 무대, 조명, 의상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뒤늦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창피하고 송구스럽기까지 하지만,
김성녀 그녀야말로
(높은 대중성과 흥행성에도 불구하고 괜히 얕잡아보는 인식에 어쩌면 피해받고 있는)
마당놀이에 대한 불공평한 관습적 벽에 숨겨져 있던 '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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